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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경 교수 도서 발간

김성경 교수 도서 발간

2023.02.06
도서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

출판사 서평

“떠나온 여자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전쟁과 분단의 격랑 속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남북이 분단된 지 어느덧 78년이 되었다. 분단 이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생을 다할 때가 되었으며, 한국 현대사에 깊게 드리워져 있던 북에 대한 적대감보다 북에 대한 거리감이 훨씬 더 압도적인 감정이 된 지도 오래되었다. 이북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래를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라는 키워드로 분단의 문제를 탐구해온 김성경(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은 북에 대한 무관심은 남한사회의 역사적 중층성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며 그들이 사실은 우리의 거울상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학술적 글쓰기에 갇히지 않고 산문, 소설, 편지 등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북조선 여성들의 역동적인 삶을 복원해낸다. 사회과학적 연구와 통찰에 기반한 상상력을 덧입혀 소개하는 다양한 여성들의 서사는 전쟁, 분단 등의 역사적 파고 속에서 한 여성의 삶이 어떠한 궤적을 그렸는지 추적하는 곡진한 기록이다. 여성 한명 한명의 삶은 분단체제가 압도하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국경을 초월해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민낯을 파헤친다. 한편으로 전쟁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구조를 극복하는 여성들의 실천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이 책은 분단이라는 한반도적 사회구조를 여성의 경험, 인식, 감정의 층위에서 분석한 “북한 연구의 절경”(정희진)이자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강건한 억압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려 노력했던 여성들의 기적적인 삶에 존경을 표하는 연구자 김성경의 절실한 마음이다.

북조선의 살아남은 여자들

인민의 전형으로부터 실제의 삶을 복원하다

1부에서 저자는 북조선 매체에서 ‘선전’을 목적으로 소개한 북조선 여성들의 삶을 재구성한다. 저자는 북조선체제가 구현하고자 하는 ‘인민의 전형’인 이들이 여느 북조선 여성과 같은 삶을 살아갔다면 겪게 되었을 경험과 감정을 인터뷰 데이터에 기초하되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서사화한다.

1장 ‘길건실-길확실’에서는 천리마시대(1956~1972)를 대표하는 노동영웅인 길확실의 수기 『천리마 작업반장의 수기』에 나온 인물과 내용을 여성주의적 독해를 통해 재해석한다. 길확실은 김일성 시대부터 김정은 시대까지 미디어와 문학예술을 통해 지속적으로 활용되는 ‘대중영웅’이다. 북조선 선전물에서는 그녀가 작업반장으로서 갖춘 의식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만, 저자는 전후시기에 갑작스레 노동자로 내몰린 젊은 북조선 여성이 경험하는 내적 갈등에 주목한다. 2장 ‘만자, 혜원’에서는 옷과 가방을 만드는 부업을 하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맞아 난관에 부딪힌 엄마 만자를 도와 의복공장을 세워 시장에 뛰어든 혜원이 화폐개혁으로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탈북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시장화와 함께 등장한 여성의 주체화 과정, 그럼에도 유지되는 가부장제의 억압이 복합적으로 재현된다. 3장 ‘수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극찬했다고 알려져 있는 영화 「한 녀학생의 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서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평범한 과학자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 인민들의 행복과 청년세대의 이상 등을 다룬 명작으로 평가받은 이 영화에서 딸 수련이 결국 과학자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는 것과 달리, 이 책에서 재구성한 수련은 아버지와 갈등 끝에 해외파견 노동자로 일하면서 경제적 안정과 일상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지낸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세계를 만든다』에서 그리는 북조선 여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손쉽게 떠올리는 북조선 여성들의 이미지나 서사와는 사뭇 다르며, 북한에서 선전하고자 했던 영웅적 삶과도 거리가 있다. 저자는 소설, 영화, 다큐멘터리 등 기존의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텍스트와 비평적 거리를 둔 채 그 속에 암호화되어 있는 실제의 삶들을 충실하게 복원해냈다.

경계에서 만난 여자들

국경을 넘나들며 재탄생하는 다면적 주체

2부에서 저자는 북한학을 연구하면서 접한 조․중 접경지역의 북조선 여성과 조선족 그리고 일본에서 만난 자이니찌(在日)와 탈북여성을 소개하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한 저자의 감정적 변화를 산문, 기행문 등의 형식을 활용하여 전달한다. 남북이 공유하고 있는 가부장적 체제에서 ‘어머니’ 역할에 골몰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어떤 이들은 좀더 자유롭고 독립된 주체성을 체현하기도 한다. 수많은 얼굴로 존재하는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남한사회와 사람들의 정체성에 깊게 내재해 있는 분단을 반추할 기회이기도 하다.

4장 ‘연길’은 저자가 연길에서 만난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다. 연길 출신의 사업가인 박사장과 그의 부인인 혜자 아주머니, 조선족 대학원생 영철, 40대 중반의 조선족 여성 은정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 연변 지역이 지닌 접경으로서의 역동성과 조선족이라는 커뮤니티가 봉착한 위기의 상황, 자신의 곁을 조용히 내주는 이웃들의 면면을 복합적이고도 긴장감 넘치게 그려낸다.

5장 ‘어머니라는 이름의 안팎’에는 저자가 조․중 접경지역에서 만난 북조선 여성들이 등장한다. 조선로동당원이라는 자부심으로 북조선 여성들의 일자리와 쉼터를 알선해주던 순영 할머니, 한족 사업가의 식당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을 하는 옥경, 조선족 노인을 하루 종일 돌보며 함께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레 사실혼 관계를 맺고 있는 정희 할머니 등이 그들로, 이들 대부분은 ‘어머니’이다. 이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 중국으로의 이주를 감행했지만, ‘어머니 노릇’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지라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북조선 여성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6장 ‘조선적 자이니찌와 재일 탈북여성’에서는 2017년 겨울 오오사까의 어느 선술집에서 만난 인연을 통해 조선적 자이니찌 커뮤니티란 정치적 집단이나 국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일상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남한의 고모를 찾는 재일 탈북여성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세대를 넘어선 이주와 이산의 경험을 조명한다.

분단, 북조선 여자들, 그리고 ‘나’

가장 낮은 곳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전복성과 해방성

마지막 3부에서 저자는 자아문화기술지의 형식을 빌려 사회학과 북한학 사이에 존재하는 연구자 ‘나’를 성찰적으로 분석하면서 북조선 여성의 삶에 매료된 이유를 추적한다. 또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연구자로서 사회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과정을 반추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연구가 스스로의 위치성과 서사를 재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7장 ‘숨겨진 분단’은 저자가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서야 시어머니의 과거를 알게 된 데 대한 먹먹함에서 출발한다. 전쟁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경험, 눈앞에서 친구와 친지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 가족이 이념에 따라 뿔뿔이 흩어진 경험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므로, 몸에 새겨진 감각이 시간의 풍파를 겪어 완고해진 것을 노년층의 고집으로 단순히 매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뭉클하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그들이 경험한 역사는 현재를 규정짓고 미래로 전수될 것이기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8장 ‘경계인, 연구자’에서는 저자의 연구자로서의 삶을 위치성의 맥락에서 되돌아본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떠난 저자에게 영국에서의 삶은 지독한 열등감과 불안감에 괴로워한 시간이었다. 젠더적이며 식민주의적인 위치로 인한 권력의 작동을 절감한 저자는 한반도라는 맥락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현상을 탈식민주의와 젠더라는 키워드로 읽어내는 것으로 연구 방향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식민과 분단 구조에서 가장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북조선 여성, 조선족 여성들이 보여준 행위주체성은 저자에게 전복과 해방의 실마리를 안겨주었다. 중심만을 지향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저자가 가장 낮은 서열에서 자매애와 가족애를 실천하는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는 장면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김성경은 이러한 진솔한 고백을 통해 ‘타자와의 만남’이 가져다준 놀라운 경험의 장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국경이나 체제 경쟁과 같은 견고한 틀을 소위 가장 약하다는 여성, 그것도 자본주의적 기준에서는 가장 가난한 북조선 여성들이 넘나들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저자의 질문을 우리 사회가 함께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